내가쓴기사

캄보디아 국제결혼 여성의 안타까운 이야기

코알라코아 2008. 7. 29. 12:06

남편 잃고 아기도 뺏긴 채 캄보디아로 쫓겨나
부나선응(캄보디아 국제결혼 여성) 이야기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착하고 건실한 샐러리맨으로 국제결혼으로 맞은 캄보디아 신부 부나선응을 아끼고 사랑했다. 사랑의 결실인 4개월 된 아들 진혁, 부나와 남편은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꿈같이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말이 잘 안통해도, 문화가 틀려도, 음식이 안맞아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한국일 지라도 아기와 남편이 있어 부나는 행복했고 미래를 꿈꾸었다.

사람이 너무 행복하면 행복의 끝이 빨리 온다는 말이 있다.
부나의 행복은 끝은 결혼생활 1년을 막 넘기며 찾아왔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40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25살의 캄보니아 여인 부나는 4개월 아기와 한국에 덜렁 남겨졌다.
남편이 죽은 후, 시댁식구가 가족으로 남긴 진실로 힘든 일이다. 하물며 머나먼 캄보니아에서 말도 안통한 스물 다섯의 외국 신부의 경우,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이 얼마간이라도 유가족에게 남겨진 경우는 더더군다나.....

부나와 아기앞으로 남겨진 3억 8천의 돈이, 가족이었던 시댁식구들을 남보다 더 못한 존재로 만들었다. 돈앞에선 치사해지고 돈앞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거라지만, 스물다섯의 부나는 아이도 뺏앗기고 보상금의 대부분도 빼앗긴채 시댁식구에 의해 강제출국 당하게 되었다. 시동생에 의해 강제로 출입국 체크를 한  부나는 시댁식구가 돌아가는 즉시 공항내 경찰에게 도움을 구했다.
아기를 두고 절대 떠날 수 없다고...
울며 불며 사정하는 스물다섯의 캄보디아 여성은 캄보디아 대사관에 인도되었고 현재 한국이주노동재단의 도움으로 아이를 되찾기 위한 소송을 준비중이다.

부나는 오늘도 모유만 먹던 아기가 분유는 잘 먹는지...잘 자는지...엄마를 찾지는 않는 지 가슴 한구석이 한없이 무너진다.


1.언제 결혼을 하였습니까?
2007년도에 결혼중계업자의 소개로 2월 19일 캄보디아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 들어 와서 2007년 11월 3일에 다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2.한국에 들어와 가족들은 누구와 같이 살았습니까?
남편과 단 둘이서 경산남도 하동 진교면 구룡리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3.시어머니는 누가 모시고 있습니까?
어머니는 혼자서 진교면 송원리 817번지에서 사시면서 농사일을 하시며 살았고 남편과 저는 토요일 일요에 농사 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4.남편들의 형제는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3남3녀중 4째 아들입니다.
형제들끼리는 1년에 3번 정도 제사나 명절에 모이는 정도이고 둘째 누나와는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5.결혼생활중 남편과의 문제는 없었습니까?
남편은 건실하고 착한 사람으로 농협 직원으로 열심히 일했고 모든 일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6.자녀는 있습니까?
4개월된 아들 이 있고 이름은 박OO입니다.

9.남편의 사고 경위를 알고 있습니까?
아무도 설명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신말기 출산 예정일을 앞 두고 시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시어머니의 집에 가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몸이 좋아진후 어머니는 농사일을 하러 다니셨고 저는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10.남편의 사망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2008년 5월 16일 남편이 퇴근 시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아 9시경 남편의 전화로 전화를 하니 친구가 받았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여 통화를 잘할 수 없어서 둘째 누나에게 전화를 하니  둘째 누나가 와서 저를 장례식장으로 데려가서 비통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1.장례식은 어떻게 진행 되었습니까?
모든 남편의 형제들에의 하여 진행되었으며 화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매장을 원  하였지만  그들에게는 저는 남편의 아내가 아닌 안중에도 없는 이방인 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결정에도 의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12.장례 과정 가운데 문제는 없었습니까?
제가 한국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가족식구들의 온 관심은 돈에 있었습니다. 저 바보 같은 외국인에게 돈을 왜 주느냐고 설왕설래 하였으며 술을 많이 먹고 막내 삼촌과 큰 아주버님의 아들이 큰소리로 싸우듯이 말을 하였습니다. 
남편이 농협직원이었기 때문에 부조금이 많이 나왔지만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13.보상 문제는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처음에는 둘째 누나로 첫째 누나의 매형으로 부터 1억원을 보상받는데 아들 5천만원 저 5천만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보상 절차는 둘째 누나와  첫째 매형이 처리 하였고 본인은 싸인 할 때만 갔습니다.

14.은행예금통장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남편이 사망한 후 3일이 지나 둘째 누나가 와서 남편의 통장, 여러장의 카드를 빼앗아 갔습니다. 저의 여권과 외국인등록카드도  가지고 가서 둘째 누나와 첫째 매형이 만들었습니다.

15.통장의 비밀번호를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7월4일 캄보디아로 가기 전날 눈 앞에 슬쩍 보여주고 도로 가져갔습니다. 통장의 주인이 저이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16.여권과 외국인등록카드는 언제 돌려 받았습니까?
저를 강제 송환 시키기 위하여 공항에 들여 보낼 때 공항 입국장 앞에서 티켓과 함께 주었습니다.

17.어떻게 캄보디아로 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인천공항 입국장 안에 들어가 경찰인지 출입국직원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아기를 두고 캄보디아로 갈수 없다고 울며 도와 달라고 하였고 출입국직원의 도움으로 캄보디아 대사관에 인계되었습니다.

18.보험은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를 하였습니까?
진주에 있는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둘째 누나와 첫째 매형 큰누나는 저의 아들을 엎고  몇군데  사무실을 들려 시키는 대로 싸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군데 들리는데 15분정도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마는  A생명에서는 아들 오천만원 저 오천만원을 받는다고 이름을 쓰고 싸인을 했고 보험회사 직원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삼성화재에서는 돈을 얼마 받는지도 모른채 경찰에서 서류가 오면은 돈을 준다고 하고 싸인하였습니다.
 얼라이언트 인슈런스서비스 인 것 같습니다.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채 싸인을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19.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법적인 처리를 하였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2008년 6월경 저는 변호사 사무실인 것도 모르는데 시어머니와 첫째 ,둘째 누나와 첫째 매형이 같이 갔습니다. 남자 변호사인지 누구인지 알수 없지만 그 분과 가족들이 이야기를 하였고 둘째 누나가 외국인이라고 하니까? 저에게 아무 말도 물어 보지 아니하고 계속 싸인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야기 할때는 다른 구석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하고 싸인을 할때만 불렀습니다. 무엇인가 알 수 없지만 보려고 하니까 큰누나가 저기 가서 앉아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채  어떤 것에 싸인을 하는지 모르는 가운데 저의 권리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20. 가족회의를 한적이 있습니까?
2008년 5월 28일에 남편의 장례 문제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저는 의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결정을 가족들이 하였습니다.  남편의 화장으로 장례가 끝나고 온가족식구 들이 시어머니 집에 모였습니다.  돈을 나누는 이야기들을 하였는데 저는 무슨 내용인 알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큰누나가 저에게 너는 애기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캄보디아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애기를 두고 캄보디아로 갈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큰누나가 바지와 팔을 걷어 부치고  왜 못간다고 해 라며 큰소리로 위협을 하였습니다. 저는 아기를 부둥켜 안고 울고 있는데 3개월된 아기를 빼앗아 방에 내려 놓고 애기도 울고 저도 울고 있는데 5-6회의 뺨을 때리고 발로 허리를 찾습니다. 계속 큰소리로 무엇이라 하는데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기가 놀라 자지러지게 울어 저는 아기를 안고 젖을 물렸습니다. 그후 저는 때릴까봐 겁이나서 큰누나가 하자는 대로 큰누나의 집을 따라 가서 거기서 잠을 습니다. 그후 저는 저의 의사가 아니라 가족들이 가자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1.가족 중에 또 다른 폭력행위가 있었습니까?
2008년 6월 2째주 경에 큰누나 작은누나가 땅을 보러 다닌다고 억지로 끌고 다녔습니다. 큰누나의 말로는 현직 경찰인데 이분이 땅을 소개 하는 것이라고 계약소를 놓고 싸인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땅사는 것이 싫다고 계약서를 찢었습니다. 큰 누나가 2-3회 따귀를 때리고 발로 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안에 있던 경찰의 부인이 말렸습니다. 큰누나가 택시를 불렀고 저를 시어머니 집으로 끌고 와서 또 때렸습니다. 뺨을 때리고 발로 찾고 있을 때 작은 누나가 발렸습니다. 그리고 큰누나는  너 없이도 땅을 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후 저는 땅문서에 싸인을 한적이 없고 아마도 변호사 사무실에 많은 서류 중에 들어 있었을 런지 모릅니다. 그 후 저는 저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들의 집을 전전하게 되었고 큰소리를 지르는 큰 누나의 위협감속에 있었습니다.

22.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까?
핸드폰을 빼앗았고 집 전화는 고장을 내놔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고 집근처에 캄보디아 여성이 있어서 만나고 싶었지만 찾아와도 없다고 하여서 자유로이 만날 수 없었습니다.

23. 오천만원을 받고 캄보디아로 가기로 한 결정은 본인의 결정입니까?
아닙니다 일방적인 강요 였습니다.

24.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아기가 분유를 먹지 않아서 모유로만 키웠습니다. 저는 밤마다 가슴이 아파서 아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기가 보고 싶습니다 아기를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저는 아기를 기르며 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