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연예

수자들 등장, 미국영화의 진화

코알라코아 2009. 5. 4. 18:34

최근 몇 년간 관객과 평단을 놀라게 하며 등장하기 시작한 미국 영화계의 강렬한 걸작들은 “미국 영화의 진화”라고 불리면서 새로운 거장들의 탄생을 알렸다. 장르 영화의 악동들로 평가되던 코엔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서부극과 스릴러가 결합된 서스펜스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주목받던 폴 토마스 앤더슨은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미국 역사에 대한 장엄한 대서사시를 창조해 내었다. <메멘토>로 인상적인 데뷔를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영국 태생)은 <다크 나이트>로 거대 자본을 투입한 블록버스터의 상상 이상의 진화를 선보였으며, 기괴한 영화 세계를 구축하던 데이빗 크로넨버그 (캐나다 태생)는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로 폭력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였다. 미국 역사의 음울한 과거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 그리고 결코 낙관적이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 영화들은 상업성과 오락성을 벗어던진 미국 영화의 진정한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헐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생산되는 상업 영화들과도 구별되고, 미국 언더그라운드에서 제작되는 재기발랄한 인디 영화들과도 다른, 이러한 묵직한 아메리칸 시네마들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마틴 스콜세지, 그리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거장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거장들의 세대로 옮겨오는 중이다. 부시 시대와 오바마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은 이라크 전, 911, 세계화, 금융 위기 등 유래없는 격변기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 공포, 무력감, 절망감은 미국 영화 속에서 새로운 담론과 은유를 창조해 나가는 동시에 새로운 연출 스타일로 이어지고 있다. 영웅적 서사나 신화적 상상력에서 탈피하여 미국의 또 다른 얼굴인 자본주의의 냉혹함, 기독교의 보수성, 정복의 역사에서 기원한 폭력의 원죄 등 그들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환기시키는 일련의 작품들은 광기어린 폭력과 증오의 묵시록을 냉혹하게 그려낸다.

시드니 루멧 감독은 데뷔작인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과 알 파치노 주연의 <뜨거운 오후>(1975), <네트워크>(1976) 등을 통해서 인간의 도덕성과 범죄 심리를 다루거나 미디어를 비판하는 사회물을 만들어 왔으며, <허공에의 질주>(1988), <패밀리 비즈니스>(1989) 등의 작품들에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작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서 이 노장 감독이 바라보는 21세기의 미국의 현실은 이제 가족마저 붕괴되고 도덕성이 무너져 내린 암울한 비극으로 바뀌었다. 항상 냉철한 시각으로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시드니 루멧은 여전히 날카로운 시각으로 불안과 공허에 빠진 인물들이 저지르는 모럴 해저드의 나락을 그려낸다. 오래된 거장의 눈으로 바라본 현대 미국의 묵시록을 그린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의 개봉과 함께 개최되는 기획전 <미국 5부작: 다크 사이드 오브 아메리카>에서는 어두운 미국의 초상을 그리는 데 있어서 선구자 격인 영화인 <이지 라이더>, 이제 아메리칸 시네마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잡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폭력의 역사>, 그리고 미국 정치 영화의 선봉에 서 있는 조지 클루니의 <굿나잇 앤 굿럭>을 상영한다. 영화제를 통해서 관객들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미국 영화들의 걸작들과 만나는 동시에 미국 영화의 새로운 부흥기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가족의 붕괴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2007년 / 미국 / 116분 / 청소년관람불가
시드니 루멧 감독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단 호크, 마리사 토메이, 알버트 피니 출연

연기파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와 플래시백 기법을 능숙하게 연출해낸 시드니 루멧 감독의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로 “시드니 루멧의 부활”이라는 호평을 이끌어낸 수작. 회계 감사로 재정 비리가 드러날 위기에 놓인 형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늘 채무에 허덕이는 동생 에단 호크는 오늘날 미국 중산층의 경제 상태를 대변하는 듯하며, 자본에 대한 탐욕에 이끌려서 마치 악마와의 거래를 하듯 범죄를 계획한 두 형제는 그리스 신화 속 비극처럼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국 자본주의가 초래한 가족의 붕괴.

자본과 악의 화신을 만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7년 / 미국 / 122분 / 18세이상관람가
에단 코엔, 조엘 코엔 감독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조쉬 브롤린, 우디 해럴슨 출연

황량한 서부를 배경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의 스릴 넘치는 서스펜스를 극대화한 코엔 형제의 역작. 절대악을 표상하는 듯한 캐릭터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숨을 멎게 할 정도의 공포감을 이끌어내며,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잔인한 폭력성이 연쇄살인마, 마약, 베트남 전의 기억과 얽히면서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개봉 당시 “타임지 선정 올해 최고의 영화 1위”, “미국 평론가 협회 선정 올해 최고의 영화”로 등극하며 관객과 평단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낸 작품. 무법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맹목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수작.

폭력의 원죄에 대한 탐구
<폭력의 역사>
2005년 / 미국 / 94분 / 18세이상관람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비고 모텐슨, 윌리엄 허트, 에드 해리스, 마리아 벨로 출연

폭력의 역사와 근원에 대한 탐구를 원초적이면서도 절제된 연출력으로 완성시킴으로써 데이빗 크로넨버그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어낸 작품. 차가운 리얼리즘에 기반한 잔인한 폭력의 묘사는 관객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며, 선과 악의 양면성을 내재한 캐릭터를 호연한 비고 모텐슨은 감독의 페르소나로 자리잡았다. 윌리엄 허트, 에드 해리스 등 폭력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명배우들의 카리스마에 주목할 것. 폭력의 기반에서 탄생한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금 폭력을 선택하는 주인공의 비극은 미국의 역사와 맞물려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낸다.

레드 컴플렉스의 광기
<굿나잇 앤 굿럭>
2005년 / 미국 / 93분 / 12세이상관람가
조지 클루니 감독
조지 클루니, 데이빗 스트래던, 프랭크 란젤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출연

연기와 연출, 각본까지 맡은 조지 클루니가 아카데미 6개 부문 노미네이트를 이루어낸 정치 드라마. 실제 영상과 연설 기록을 사용하여 사실감을 더했다. CBS 뉴스 앵커였던 실존 인물 에드워드 R. 머로우를 주인공으로 하여 1950년대 초반 미국에 불어닥친 맥카시 열풍에 맞서는 언론의 양심을 긴장감있게 그려낸 수작이다. 냉전 시대에 조장된 공산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가 미국을 뒤덮은 시대에 진실을 무기로 하여 정부에 용기있게 대항한 한 언론인과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흑백 화면으로 담백하게 그려내었다. 레드 컴플렉스의 광기 속에서 지켜낸 진실의 힘.

자유 정신의 죽음
<이지 라이더>
1969년 / 미국 / 95분 / 청소년관람불가
데니스 호퍼 감독
데니스 호퍼, 피터 폰다, 잭 니콜슨 출연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모터싸이클의 이미지가 강렬한 이 영화는 1960년대의 미국 청년 문화를 생생하게 반영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보수 진영의 적대감을 거침없이 묘사하였다. 두 주연 배우가 각본을 썼으며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잭 니콜슨은 이 영화에서의 조연으로 첫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반전운동과 마약에 심취했던 자유로운 히피 문화와, 편견과 보수주의로 억압된 미국의 실상을 대비시키면서 미국의 실체를 발견하게 만드는 로드 무비. 세상에 대한 반항과 이상주의를 꿈꾸었던 두 청년이 도달한 종착점은 마치 미국의 자유 정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느낌을 준다.